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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창민 LIM CHANG MIN

Homage to   

박동준 2026

임창민 LIM CHANG MIN

04. 23. – 05. 22. 2026.

HOST

(사) 박동준 기념사업회   P.D.J. Memorial Foundation

Organize

갤러리분도   Gallery Bundo

41952 대구광역시 중구 동덕로 36-15 3F   Tel. 82 53 426 5615   Fax. 82 53 426 2655   E-mail. gallerybundo@nate.com
36-15, Dongdeok-ro 14-gil, Jung-gu, Daegu, 41952, Rep. of Korea    www.bundoart.com

차경’의 변용과 정중동의 미

―임창민의 미디어아트 세계

임창민의 미디어아트는 정중동(靜中動)의 미감이 진국입니다. 사진+영상 작품은 보는 순간 고요한 충격을 선사합니다. 세련된 단순미가 인스타그램의 ‘간지나는’ 사진 같습니다. 자세히 보면 실내 공간이 전경을 이룹니다. 정적(靜的)입니다. 그 가운데에 창이 있습니다. 창은 안락한 내부와 야생의 외부를 가르는 경계이면서 두 세계를 잇는 투명한 막입니다. 막의 중심에 영상이 있습니다. 물결이 일고 나뭇잎이 흔들립니다. 정중동인가 하면 동중정(動中靜)입니다.

 

정지된 공간과 흐르는 풍경의 이중주
영상은 작품에 절제된 활기와 생동감을 부여합니다. 바람결에 나부끼는 노랗게 물든 은행잎, 요트가 가득하거나 포말이 이는 바다, 눈 내리는 산사(山寺)의 설경, 거리의 노점상과 행인들, 강이 보이는 야경, 빌딩이 가득한 뉴욕과 센트럴파크에 이르기까지, 작품은 요란함을 배제한 채 자연과 도시의 가장 느린 시간성을 담아냅니다. 이러한 움직임은 창을 경계로 또렷해지는데, 창은 정적인 실내와 부드럽게 흐르는 외부 풍경을 가르는 동시에, 하나의 틀로서 풍경에 다양한 체형을 입혀줍니다. 이를테면 창의 모양에 따라 풍경은 직사형이 되기도 하고 사각형이나 격자 모양, 또 아치형이 되기도 합니다.
이는 다시 감상자의 마음을 디자인합니다. 자극적인 이미지에 인이 박인 현대인에게 이 음소거(音消去)된 정중동의 세계는 든든한 휴식이 됩니다. 고요 속에 넣어둔 움직임은 감상자의 걸음걸이와 호흡을 늦추고, 느린 파동 속에서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게 합니다. 작품 앞에 서면, 정지된 내부와 흐르는 풍경이 어우러져 조용한 시간의 층을 빚습니다. 그 시간은 일상에서는 거의 경험할 수 없는 ‘느림의 시간’이고 ‘힐링의 시간’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감상자는 아주 미세한 감각의 회복을 경험합니다.
이러한 구조는 자연스럽게 전통 건축의 ‘차경(借景)’ 개념과 오버랩됩니다. 차경이란 외부 풍경을 창이나 틈을 통해 내부로 끌어들여 공간에 깊이를 주는 방식입니다. 임창민은 이 개념을 현대적으로 변용하여, 풍경을 불러오는 프레임이자 투사 장치로서 창을 활용합니다. 전통 건축에서 차경이 자연을 빌려와 공간을 확장하는 방식이었다면, 그의 작품에서 차경은 잊었던 감각과 시간을 되찾아주는 매개가 됩니다.
그런데 ‘차경’의 원리처럼 시선을 유도하고 감각의 층위를 조직한다는 측면에서 떠오르는 옛 그림이 있습니다. 조선 후기의 화가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 1745~1806?)가 그린 「소림명월도(疏林明月圖)」(1796)가 그것입니다.
이 그림의 묘미는 어디에 있을까요? 바로 달의 위치입니다. 화가는 둥근 달을 온전히 보여 주지 않습니다. 잡목 너머(사이)에 배치해두었습니다. 이에 따라 감상자는 달을 ‘직접’ 보지 못하고, ‘가지를 통해’ 봐야 합니다(직접 달을 볼 때와 간접적으로 볼 때의 차이는 큽니다). 이는 화가가 설계한 ‘시선의 길’인데, 감상자는 그 길을 따라 시선을 이동하게 됩니다. 또 다른 묘미는 화폭 아래쪽에 있습니다. 있는 듯 없는 듯 흐르는 미미한 개울입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이 작은 움직임이 정적(靜寂)을 더욱 고조시킵니다. 가지 사이에 배치한 달뿐만 아니라 고요 속에 가미한 미세한 동적인 요소는 정중동의 핵심요소로서 임창민의 작업과 놀라울 만큼 닮아있습니다.
그의 작품에서도 실내와 영상의 조합이 원래 그런 풍경인 듯 스타일리시합니다. 전경은 후경의 주목도를 높이고, 후경은 전경에 생기를 불어넣습니다. 개울과 짝이 되는 영상은 또 어떻습니까. 잔잔한 움직임이 작품에 추임새를 더합니다. 작품의 의미는 전경과 후경의 상호작용에서 발생합니다. 이것이 바로 「소림명월도」가 지닌 구조적 미학(나뭇가지→달, 동적인 개울)과 임창민의 사진+영상 작품이 공유하고 있는 깊은 친연성입니다.
결국 정적인 공간과 흐르는 풍경의 만남은 감상자의 시선을 붙잡고 ‘본다’는 행위를 하나의 사건으로 정교하게 구성합니다. 작가는 단순한 시각 경험을 넘어서, 넘쳐나는 이미지와 소음에 포획된 현대인에게 잠시 숨을 고르는 시간을 건넵니다. 작품과 함께하는 동안 감상자는 한눈을 팔 수 없습니다. 작품이 요구하는 속도에 자신을 맞추며, 느리게 움직이는 영상을 통해 깊은 관조(觀照)에 잠깁니다. 이는 속도가 지배하는 시대에 맛보는 특별한 경험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특별함은 자연스럽게 치유의 감각을 동반합니다.

 

재구성된 풍경의 깊이
임창민의 풍경은 단순한 자연의 기록이 아닙니다. 그것은 서로 다른 장소와 시간대에서 채집한 장면들을 작가가 편집하고 재구성한 것입니다. 이렇게 탄생한 풍경은 실재하지는 않지만, 마치 존재하는 듯한 자연스러움으로 감상자에게 편안함을 안겨줍니다.
재구성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작가의 섬세한 감각입니다. 작가는 전경과 후경의 촬영 순서를 고정하지 않고, 두 이미지가 가장 자연스럽게 호응하는 조합을 찾기 위해 긴 시간을 들여 장소를 탐색하고 기다립니다. 때로는 먼 나라로 이동하기도 하고, 어떤 날은 특정한 빛을 기다리며 한 자리에서 시간을 흘려보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이러한 과정은 단순한 영상 수집이 아니라 풍경과 관계를 맺는 일종의 수행에 가깝습니다.
촬영된 영상은 편집 단계에서 재탄생합니다. 요란한 움직임이나 강렬한 색감은 과감히 덜어내고, 전경과 합이 맞는 영상들을 선택합니다. 작가는 사진과 영상의 조화를 통해 잔잔한 공간 연출에 작업의 비중을 둡니다.
결합된 전경과 후경은 또 단순한 병치가 아닙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가 됩니다. 정적인 실내의 체형은 바깥 풍경의 표정을 선명하게 받쳐주고, 영상 속의 미묘한 움직임은 실내의 고요를 깊게 다져줍니다.
이 관계는 ‘홍운탁월(烘雲托月)’의 원리와도 닮았습니다. 동양화에서 달을 그리지 않고 구름을 그려서 달을 드러내는 것처럼(「소림명월도」의 달이 그렇습니다!), 작가의 작업도 영상을 직접 노출하지 않습니다. 전경의 사진(의 창)을 통해 후경인 영상을 드러냅니다. 영상은 전경(의 창)의 체형과 표정에 의해 다른 느낌을 자아냅니다. 그러니까 감상자가 영상으로 직진하게 만드는 대신 주변의 분위기와 정황을 조성해둠(사진)으로써 스스로 몰입하고 의미를 발견하게 합니다.
이런 풍경은 이상향의 이미지로 다가옵니다.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으나 ‘어딘가에 있을 법한’ 자연의 모습 말입니다. 감상자는 이들 풍경을 기억 속의 자연과 연결 짓기도 하고, 마음속의 쉼터처럼 받아들이기도 하며, 때로는 현실에서 포착하기 어려운 고요의 진수로 경험합니다. 이처럼 재구성된 풍경은 감상자의 감정과 기억이 몸을 푸는 자리가 되는 한편, 작품을 보는 경험을 감각적·정서적 층위로 업그레이드시킵니다.

 

창이 만드는 또 하나의 시간
임창민의 창은 단순한 구조물과는 거리가 먼 ‘신스틸러’입니다. 작품에 없어서는 안 될 주연급 조연역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전경과 후경, 고요와 흐름, 정(靜)과 동(動)을 가르는 동시에 이 둘을 잇는 중요한 매개체입니다. 또한 풍경을 보여 주는 틀을 넘어, 감상자의 시선과 호흡, 감각을 재조직하는 도구로 기능합니다.
창은 실내와 바깥 풍경을 연결하며 두 세계가 충돌하지 않고 차분히 공명하게 합니다. 영상은 소리를 제거한 채 시각적 흐름만 남김으로써 한층 고요해지고, 감상자는 고요 속에서 자신의 감정을 무장해제당합니다. 그리고 풍경을 자기 방식대로 경험합니다. 어떤 이는 그것을 해외여행의 기억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고, 어떤 이는 명상적 공간으로, 또 다른 이는 현실에서 잃어버린 평온의 한 조각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작가의 이야기에 자신의 기억을 포개 보는 겁니다. 그 순간 풍경은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나의 이야기’가 됩니다. 작품은 감상자의 감정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층을 빚습니다.
이 구조는 현대인의 피로와 분산된 감각에 대한 조형적 응답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과도한 이미지 소비와 빠른 속도로 내닫는 일상에서 감각은 금세 마모되고 집중력은 쉽게 흩어집니다. 그의 작품은 이런 흐름에서 벗어나 잠시 멈춰 설 수 있는 공간과 시간을 마련합니다. 창은 그저 풍경을 보여 주는 존재가 아니라 보지 못했던 감각이 다시 작동하도록 돕는 일종의 감각적 기제입니다.
이 지점에서 작품은 치유적 성격을 은근히 드러냅니다. 치유는 큰 변화를 불러일으키는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서서히 잊힌 감각을 되살리는 과정입니다. 그의 작품은 삶에 즉각적인 변화를 추동하지는 않지만, 작품 앞에서 느낀 고요한 호흡은 감상자가 누리는 일상의 감각과 보법을 반추하게 만듭니다. 창이 베푸는 풍경은 결국 외부 세계를 향한 것이라기보다 감상자 자신의 내면을 비추고 반사하는 거울에 더 가깝기 때문입니다. 과하게 날선 감정이 가라앉고 내면의 공허가 긍정적인 에너지로 채워집니다. 이 정서적 안정과 충만은 작가가 쥐여준 것이 아닙니다. 감상자 스스로 길어 올린 치유의 감각이고 충만입니다.

 

보는 것을 넘어 경험으로
임창민의 작품은 이처럼 세계를 새롭게 보도록 이끌면서, 이미 우리 안에 있으나 잊혀 있던 감각을 조용히 불러냅니다. 이미지 과잉의 시대 속에서 그의 작업은 삶의 속도를 한 템포 늦추고, 창(속의 영상)을 매개로 감각과 시간, 사유가 느슨하게 이어지도록 놓아둡니다. 그 앞에 선 감상자는 영상 안에 머물며 ‘지금 여기’의 시간을 비로소 자각하게 되고, 그 자각 속에서 스스로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게 됩니다. 결국 작품이 건네는 것은 정중동의 미감으로 조율된 새로운 시방식(視方式)을 통해 각자의 감각과 시간을 되돌아보고 회복하게 하는 경험입니다.

 

【덧붙임】 미디어아트 옆 신괴석도
이번 전시 출품작에는 사진 작품이 함께합니다. 기이한 형상의 괴석(怪石)을 담은 작품입니다. 작가가 방문한 한 섬에서 새벽녘에 마주친 이 괴석은, 마치 자연이 빚어낸 조형물처럼 매혹적이었다고 합니다. 작가는 괴석을 촬영하되, 정면과 측면, 배경 속의 모습 등 다각도로 포착합니다. 그것도 조형적 개입을 통해 새롭게 보여 줍니다. 괴석의 존재감을 강조하기 위해 주변 요소를 과감히 덜어내거나 푸르스름한 새벽빛에서 영감을 받은 블루 계열의 색을 입혔습니다.
이러한 작업은 19세기 후반 화가들 사이에서 유행한 ‘괴석도(怪石圖)’를 떠올리게 합니다. 괴석도는 화폭마다 주인공으로 등극한 돌들의 기이한 형상이 이채를 띱니다. 왜 하필 돌에 주목했을까요. 예로부터 돌은 천지의 기운을 온전히 품은 귀한 자연물로 여겼습니다. 더불어 돌의 변함없는 속성은 군자의 이상적 품성과 겹쳤고, 장수를 상징하는 존재로서 축수(祝壽)의 의미 또한 지녔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임창민의 괴석 작업도 「소림명월도」와 미디어아트의 관계처럼 과거로부터 대물림되어온 조형 유전자가 작가의 무의식에 잠재해 있다가, 어느 순간 예기치 않게 발현된 현대적 변용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신괴석도(新怪石圖) 사진과 사진+영상 작품은 어떤 관계일까요. 겉으로는 서로 다른 형식처럼 보이지만, 내부의 작동 방식은 맞닿아 있습니다. 두 작품 모두 대상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촬영 후 가공과 편집을 통해 새로운 이미지로 승화시키고 있습니다. 결국 현실의 대상을 매개 삼아, 현실에는 없지만 어딘가에 실재할 것 같은 풍경과 괴석을 창출했다는 점에서, 두 작품은 동일한 창작 원리를 따른 조형적 혈연관계라 하겠습니다.

 

글/ 정민영(아트 인터프리터, 아트무빙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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