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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영남일보] 예술2代 디자이너 박동준씨2020-09-18 18:48
작성자 Level 8

예술2代 디자이너 박동준씨

영남일보 2003-06-18 


일을 가진 어머니를 보고 자란 딸은 대부분 현모양처를 꿈꾸었을 것이다. 학교에서 돌아와 텅빈 집에 들어설 때면 ‘나는 저렇게 살지 않을 거 야’하고 다짐을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일하는 어머니를 둔 딸이 더 많 은 일을 갖는 사례를 종종 본다. 그것도 어머니와 같은 분야에서 일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대구 패션의 자존심’이라 불리는 디자이너 박동준씨(52). 그녀도 옷을 만들고 원단을 판매하던 어머니와는 분명 다른 삶을 꿈꿨다. 하지만 어느 새 그녀는 벌써 어머니와 똑같은 자리에서, 어찌보면 어머니보다 더 많은 일을 해나가고 있다.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던 제가 패션디자이너가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멋내기에 유달리 관심은 많았지만, 어머 니가 힘들게 일하는 모습을 보면서 저 일은 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지요( 그 당시 어머니는 원단 소매업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우연한 한 사건은 그녀와 그녀 어머니 김옥순씨(74)의 삶을 완 전히 바꿔 버렸다. 


기자이던 아버지와 결혼한 어머니는 결혼 후 가정형편이 어려워지자 생업 전선에 뛰어들었다. 어렸을 때부터 온 집안 식구의 옷감 은 어머니가 골랐을 정도로 색 감각이 뛰어난 어머니는 원단업을 했다. 하 지만 그 당시만 해도 일하는 여성이 많지 않던 시절이라 여자 혼자 가게 를 꾸려 나가기는 쉽지 않았다. 원단을 주고 잔금을 못받는 일도 허다했다 . 


어머니가 처음 패션에 손을 댔던 ‘코코의상실’도 원단 잔금을 다 치를 수 없었던 의상실 주인이 잔금 대신 인수권을 넘겨 시작하게 됐다. 막상 의상실을 넘겨 받았지만 운영이 쉽지는 않았다. 어머니 김씨는 “ 어렸을 때 어깨 너머로 할머니, 어머니가 옷 만드는 것은 봤지만 직접 만 들어 본 적이 없어 기술자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기술자들이 애를 먹인 생각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고 말했다. 이런 어머니의 어려움을 보던 박 씨는 자연스럽게 어머니를 도와주게 됐고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했던 일의 즐거움을 맛봤다. 


박씨는 대학 4학년 때인 1974년 어머니가 운영하던 ‘코코의상실’을 ‘ 코코 박동준’으로 이름을 바꾸고 본격적으로 패션업에 뛰어들었다. ‘박동준 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오늘의 박씨가 있기까지 어머니는 그녀에게 디자 이너가 가져야 할 능력을 물려 준 은인이자 조력자, 동반자였다. 어머니 김씨는 아직도 365일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매장에 나와 그녀에게 힘을 주고 있다. “처음에는 사실 일을 배우고 같이 하면서 많이 부딪쳤지만, 요즘은 서 로 의지가 돼요. 지금도 공장에 제일 먼저 나와 직원들 관리하고 제가 상 대하기 힘든 나이드신 분은 어머니가 이야기 상대가 돼주시지요.” 어머니는 원단업으로는 성공했지만 디자이너로서는 다소 아쉬움이 남았던 과거를 딸을 통해 보상받을 수 있어 흐뭇하다. 


디자이너라는 말조차 없던 시절 옷을 만들던 어머니는 지금 대구 패션계를 이끌고 있는 딸을 보면 그렇게 자랑스러울 수가 없단다. 그리고 지금까지 계속 매장에서 일할 수 있도록 배려해 준 딸이 고맙기도 하다. 김씨는 “사실 30년 이상 한 매 장에서 같이 일한다는 게 쉽지는 않다. 딸이 나를 잘 이해해줘 가능한 일 ”이라고 했다. 그러나 박씨는 “디자이너가 옷을 만드는 것에 그치지 않고 문화를 선 도하는 직업이라는 것을 알려준 것이 어머니이고, 제 적성을 꿰뚫어보고 디 자이너의 길로 안내해 준 것도 어머니”라며 “오히려 고마워할 사람은 나 ”라고 말한다. 

우연찮게 시작한 일이 평생의 업이 돼버린 모녀. 그녀들은 이 우연찮은 운명을 그 누구보다 사랑하고 축복받은 삶이라 여기고 있다.


김수영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