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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 인터뷰


Column & Interview

패션·문화·봉사 등 직함만 10개 넘는 디자이너 박동준

작성자
박동준기념사업회
작성일
2020-11-03 16:52
조회
1264
영남일보 2011-07-01





“옷만 만들었다면 삶의 가치 몰랐을 것…그래도 대구의 딸로 살기 힘드네요”
(1951년생인 그녀는 좋아하는 일을 하기 위해 아직 싱글이다)
22세때 엄마 도우려 의상실 시작
사실 멋내는 걸 좋아했었죠



대구를 대표하는 디자이너 박동준씨는 패션을 하려는
후배나 제자들에게 미술에 대한 관심을 끊지 말라고 조언한다.
“대구의 딸로 살기 힘듭니다. 참, 이제 딸이 아니라 엄만가.”

대구를 대표하는 패션디자이너 박동준씨(60)는 “패션 쪽에서도 도와야 될 일이 많고 미술계를 위해서도 할 일이 적지 않고…”라며 이렇게 말했다.

박동준 패션 대표, 갤러리분도 대표, 아름다운가게 대구경북 대표, 계명대 패션디자인학과 겸임교수, 대구아트페어 운영위원장, 이상화 기념사업회 부회장, 한국패션산업연구원 이사, 대구국제패션페어 운영위원, 대구경북패션조합 이사, 2011대구세계육상 자체제작 유니폼 전문위원장 등 그녀의 이름 뒤에 붙는 큼직한 직함이 10개를 훌쩍 넘어선다. 덕분에 늘 회의와 미팅의 연속인 삶을 사는 그녀다. 이만하면 ‘대구의 딸로 살기 힘들다’는 말이 나올 만하다.

연세도 있고 일을 좀 줄이는 게 어떠냐고 했더니 그녀는 “줄일 수 없는 게, 내가 해야 할 일들이 많다는 생각이 들어서…”라며 웃는다.

“그래도 힘이 있고 사회가 필요로 해서 일을 할 수 있는 게 고마운 일이잖아요. 이런 활동을 하지 않고 옷만 만들었다면 재미도 없었을 것이고 삶의 가치도 이만큼 알았을까 싶습니다. 사회에 봉사하는 것도 너무 젊지도 너무 늙지도 않은 나이에 에너지가 있기에 하는 거라 좋아요. ‘저 사람은 정말 힘이 부쳐서 일을 못하는구나’라고 모두가 동의하는 순간이 올 때까지는 열심히 일하고 있을 겁니다. 앞으로 2~3년간은 지금처럼 계속 바쁠 것 같은데요.”

지난달 28일 패션과 문화가 어우러진 대구시 중구 박동준 빌딩 1층 소파에서 그녀와 마주앉았다. 그녀는 블랙과 화이트가 섞인 의상을 입고 있었다. 집에서는 흰 옷만, 공적인 장소에서는 검은 옷만 고집한다고 들었는데 ‘오늘의 의상 컬러도 그 범위 안에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내 왜 굳이 화이트와 블랙 의상을 고수하느냐고 물었다.

“여름에는 공적인 장소에서도 흰옷을 많이 입어요. 블랙이나 흰색이 나에게 주는 영감이 많거든요. 나를 비운다는 의미에서 집에서는 흰옷을 입고, 밖에서는 겸손함이나 자신감·카리스마를 드러내기 위해 블랙 의상을 주로 입죠. 한번씩 블루나 그레이 의상을 입기는 하는데 입으면 금방 벗고 싶어져요. 오늘은 사진도 찍는다고 해서 옷을 여러 벌 갈아 입으며 신경썼어요(웃음).”

◆ 멋내기 좋아하던 여대생, 디자이너가 되다

- 원단 소매업을 하다 의상실을 열게 된 어머니를 돕겠다는 생각으로 디자이너의 길로 들어섰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2남1녀 중 맏이예요. 아버지가 기자생활 13년을 하면서 술을 많이 드신 탓에 간이 나빠져서 병원에 계셨어요. 우리를 공부시키려면 어머니가 돈을 벌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 거죠. 원단 소매업보다는 의상실 수입이 더 좋으니까 제가 22살 때(1972년) 의상실을 시작했어요. 엄마가 옷 만드는 기술이 뛰어나지 않아서 고객들이 옷을 입어보고는 불편하다고 불평하고 팔이 안올라간다고 하고…. 그렇게 혼자 고생하면서 일하는 엄마가 너무 안됐더라고요. 엄마를 도와주겠다는 생각으로 시작하게 됐어요. 마침 계엄령 선포가 내려져서 성명여중에 교생실습 가는 것 외에 학교를 안가도 됐거든요.”

- 잘 되던 의상실을 물려받은 건 아니네요.

“엄마가 기술이 없을 때 시작했어요. 주문이 많이 들어오긴 했지만 옷을 찾아가지 않는 사람이 많으니 힘들었죠. 알뜰하게 모아 샀던 집을 몇채나 팔아서 의상실에 투자해야할 정도였으니까요. 시작하고 한 5년 정도는 적자였어요.”

- 원래 꿈은 무엇입니까.

“기자였다가 고등학교 들어가고부터는 디자이너로 바뀌었어요. 굉장히 멋내는 걸 좋아했기 때문에 멋내기 위해 디자이너가 돼야겠다는 철없는 생각을 했었죠.”

 

◆ 디자인 스승을 만나다

- 디자인 스승인 이종천 선생님은 어떻게 만나게 됐습니까.

“아버지를 존경하는 후배가 의상실에 와보고‘선배 딸을 이렇게 공부시켜서는 안 되겠다’면서 포항 바닷가로 데려갔어요. 운좋게 그곳이 우리나라 최초의 남성 디자이너이자 패션 교육자였던 이종천 선생님 댁이었어요. 몸이 안 좋아서 요양하고 계셨죠. 아버지 후배가 ‘선배 딸인데 잘 좀 가르쳐달라’고 부탁했더니 선생님께서는 ‘내가 몸도 안좋고 얼마 살 지도 모르기 때문에 될성부른 친구가 아니면 가르치고 싶지 않다. 나와 인연이 있고 큰 인물이 될만한 사람인지 아는 스님에게 물어보고 결정할 테니 생년월일시를 적어놓고 가라’고 하시대요. 얼굴도 안 쳐다보고…. 한달쯤 지나고 나서 선생님께서 저희 부모님을 만나러 오셨어요. ‘따님이 이쪽에 연이 있는데다 디자이너로 성공할 운을 갖고 있다. 나를 믿고 맡겨주면 잘 가르쳐보겠다’고 하셨어요. 그후부터 3년쯤 선생님에게서 사사하게 됐죠. 재단법, 가공법, 손님 맞는 법 등 지금도 선생님께서 가르쳐준 대로 하고 있어요.”

- 디자인을 하다가 미술대학원을 간 이유는 무엇입니까.

“역시 이종천 선생님의 가르침이었어요. 디자인을 하려면 그림을 배우라고 말씀하시더라고요. 26세(1976년)에 미술대학원에 들어갔죠. 선생님도 일본 다마미술대학과 일본문화복장학원을 나온 인텔리 디자이너였어요.”

- 어머니가 의상실을 했고 아버지의 지인을 통해 디자인 스승을 만났잖아요. 어찌보면 편안하게 디자인 길을 걸어온 게 아닌가 싶습니다만.

“운명적으로 디자이너로 가는 길이 톱니바퀴처럼 이가 딱 맞아 들어갔던 것 같아요. 너무 자연스럽게…. 처음 디자이너가 됐을 때는 내가 생각해도 별로 실력이 없었던 것 같아요. 그냥 열정으로 열심히 하면 고객들이 ‘정말 멋있다. 독특하다. 배운 사람이라 옷을 다르 게 한다’는 등의 말로 용기를 많이 줬어요. 78년에서 80년 중반까지 빅룩이 유행이었거든요. 어깨를 크게 하고 옷도 루즈한 패션스타일인데, 선생님이 가르쳐준 디자인과 나의 능력 등이 잘 맞아서 그 무렵부터 승승장구하게 됐어요.”

- 디자이너 인생 39년 중 가장 전성기는 언제였습니까.

“비즈니스는 88~94년까지가 잘 됐어요. 수입품도 많이 들어오지 않을 때였고…. 2004년 12월에 박동준 패션 건물(대백프라자 인근)을 지어 이사왔는데 이 건물로 오고부터 안 바빴던 적이 없어요. ‘극장·갤러리·작업장·레스토랑이 다 함께 있으면 옷작업을 외롭지 않게 할 수 있겠다. 이 건물이 문화사랑방 역할을 해주면 즐겁게 생활할 수 있겠다’ 생각했는데 그게 맞아 떨어진 것 같아요.”

- 패션 아이디어를 뮤지컬·연극·문학에서 얻는 건 단순히 관심의 반영은 아니겠죠.

“옷을 만들 때 가지는 디자이너의 세계를 문학·뮤지컬과 결부시킴으로써 옷을 만드는 태도와 정신을 보여주는 거였어요. 저만의 옷이라는 차별화를 위해 시작했는 지도 몰라요.”

◆ 문화예술인으로 살다

- 아름다운가게 대구경북 대표, 이상화 기념사업회 부회장, 대구아트페어 운영위원장 등 상당히 많은 직함을 가지고 있는데, 그래도 패션디자이너로서의 삶이 가슴뛰는 삶입니까. 갤러리에 빠져있지 않나는 생각이 들기도 해서요.

“디자이너로서의 삶이 가장 가슴 뛰어요. 갤러리 오픈한 지 1년 정도 지났을 때인데, 갤러리에는 만드는 즐거움이 없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옷은 만드는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데, 내가 그동안 만드는 데에 대한 기쁨을 놓치고 있었구나 싶어서 옷을 더 열심히 만들었어요.”

- 협회나 아트페어 등 어떤 일을 제의 받으면 쉽게 승낙하는 스타일입니까.

“금방 금방은 안 하죠. 대구아트페어도 만류를 많이 했어요. 2009년에 운영위원장 하라기에 사양을 했더니 운영위원을 하라대요. 그럼 그러겠다고 했죠. ‘그때 운영위원장을 누굽니까’라고 물어보고 승낙을 했어야 했는데…. 운영위원 모인 자리에 가니까 이 자리에서 운영위원장을 뽑는다더라고요. 그러다 내가 하게 된 거예요. 처음에는 멋도 모르고 했고, 두번째는 잘하고 싶고 끝이라는 마음으로 했고…. 이번에는 3년째 또 맡게 됐는데요. 올해는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은행에서도 그림을 사러오기로 이야기가 돼 인지도 있는 사람이 운영위원장을 맡았으면 하더라고요. 대구를 위한 일이니 에너지가 있을 때 해야죠. 대구아트페어가 우뚝서는 대구의 대표 문화행사가 될 수 있게끔 열정을 쏟겠습니다.”

- 2004년부터 아름다운가게 일도 하면서 봉사를 하고 있죠.

“윤순영 대구 중구청장의 소개로 시작하게 됐어요. 애초에는 박원순 변호사가 윤 구청장에게 먼저 제의한 건데 윤 구청장이 이미 다른 대표직을 맡고 있던 터여서…. 취지가 좋은 운동이라서 내가 한다고 했어요. 하나를 시작하면 또 꾸준히 오래하는 편이에요. 좀 손해 보더라도 보이지 않는 돈도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 결혼은 일 때문에 바쁘게 산다고 안하신 겁니까.

“아버지가 지난 1월에 돌아가셨는데 아버지를 보살피는 문제 등으로…. 맏이로서 해야 되니까. 예술 쪽 일을 좋아하는 게 혼자이기 때문에 남는 에너지를 쏟을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해요. 뭐든 배우는 걸 좋아했어요. 요즘은 책을 많이 보고요. 어릴 때 이렇게 공부를 열심히 했으면 뭐라도 됐겠다 싶을 정도로. 제가 제일 사치하는 게 책 사는 거예요.”

(아버지 이야기가 나오자 그녀는 휴대폰 배경화면에 저장된 아버지와 찍은 사진을 보여주기도 했다.)

◆ 인연을 맺다

- 윤석화·최정원 등 뮤지컬 배우와도 친분이 있던데, 어떤 인연입니까.

“서울의 많은 문화예술인을 박정자 선생님을 통해서 알게 됐어요. 85년 연극배우 박정자씨를 후원하는 대구 모임을 했는데 제가 회장으로 있었거든요. 이를 인연으로 윤석화씨를 알게 됐고, 또 윤순영 구청장이 뮤지컬을 대구에 가져오면서 뒤풀이할 때 참석하며 최정원, 남경주, 배혜선씨 등과 친해지게 됐죠.”

- 윤 구청장은 아버지가 소개해줬다고요.

“아버지가 윤 구청장이 운영하던 서점의 최고령·최다독 단골이었어요. 우리 딸과 친구하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소개해준 거래요.”

- 윤 구청장과는 늘 함께하는 사이 같습니다.

“84년에 만났는데 서로 성격은 너무 달라요. 문화예술을 사랑하고 봉사를 좋아하는 건 착착 마음이 맞지만…. 윤 구청장이 책도 많이 읽었고 사고도 깊고 해서 나한테 상담이나 조언을 많이 해줬어요. 한동안은 내가 의논을 많이 하는 친구였고 내게 도움도 많이 줬어요. 지금은 내가 도와주는 입장이지만…. 세상에 공짜는 없더라고요.”

◆ 박동준

1951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계명대 영문학과와 계명대 대학원 미술교육과를 졸업했고, 동대학원 의류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72년부터 디자이너의 길에 들어선 뒤 지금까지 39년동안 50번 가량의 개인쇼를 포함해 수많은 그룹쇼·예술의상전시 등을 펼치며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98년부터는 SFAA(서울패션아티스트 협의회) 회원으로서 매년 2회 정기쇼에 참가하고 있으며, 세계패션그룹(FCI) 한국협회 회장직을 역임한 바 있다. 2004년에는 한국패션브랜드 대상을 수상했다.